[허핑턴포스트코리아 창간 1주년 독점 인터뷰] 탈북자 신동혁 "죽음의 수용소, 14호 탈출은 거짓이 아니다"

Mar 5, 2015 ParkOn 으로부터 'TV 연예 뉴스 매거진' 포럼이 포스트되었습니다.

  1. ParkOn

    ParkOn 멤버

    허핑턴포스트코리아는 창간 1주년을 맞이해 2015년 3대 기획 시리즈를 추진합니다. 국내외적으로 첨예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북한 인권과 탈북자 문제, 30만을 넘긴 다문화 가정, 불법과 합법을 통틀어 170만 명에 육박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다루게 될 것입니다. 그 첫 문을 여는 기사는 북한 인권문제의 핵심 인물로 떠오른 후 여러 가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신동혁 씨와의 인터뷰입니다. / 편집자주​


    # 손미나와 원성윤의 ‘더 인터뷰’(The interview)

    [​IMG]

    대담 = 손미나 편집인, 원성윤 에디터
    사진 = 김성룡 / Studio Bob

    신동혁은 개천 정치범수용소를 탈출한 세계적인 북한 인권 운동가이다. 본명은 신인근이었으나, 탈북을 도와준 기자의 이름을 딴 신동혁으로 개명했다. 그의 증언을 쓴 책 ‘14호 수용소 탈출’은 27개국에 번역 출판되며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알리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UN의 북한 인권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진술이 됐다.

    그러나 2014년 9월 24일, UN 주재 북한 상임대표부는 북한인권 보고서 채택과 관련국들의 움직임에 반박하는 공보문을 발표했다. 신동혁의 진술 내용은 한국의 공작에 의한 날조이며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신동혁 자료 전문'이 포함된 것이었다. 또한 북한 TV에서도 신 씨를 불법 월경과 성범죄 등을 저지른 범죄자로 묘사했다.

    그 후 신동혁 씨는 본인의 초기 진술을 번복했고 이에 따라 치열한 진실 공방이 이어지며 국제사회에 파문이 일고 있다.

    지난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도 이 같은 공방이 벌어졌다. 이수용 외무상은 COI 조사과정에서 신동혁 씨의 증언 번복에 대해 “기초가 됐던 핵심증언이 거짓으로 판명돼 유엔 인권이사회와 유엔총회의 반공화국 인권결의들의 허위성이 여지없이 입증됐다”며 북한 인권결의안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내외 어느 매체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던 신 씨가 지난 2월 26일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 만났다. 신 씨는 서울 이태원의 한 카페에서 약 3시간 30분간 진행된 인터뷰에서 △어머니와 형이 자신의 신고로 처형된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점, △고문 사실 중 일부는 숨기고 싶었던 점, △북에 남아 있는 아버지를 보호하고 싶었던 점 때문에 처음에 사실을 편집해 증언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그는 “7~8년 뒤 내 삶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모두 다 얘기했을 것”이라며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용소에서의 경험담은 모두 진실이며 나의 최종 목표는 UN 실사단을 이끌고 내가 고통받았던 14호, 18호 수용소를 방문해 실체를 모조리 밝혀내는 것”이라며 북한이 자신을 비난하는 동영상을 공개함으로써 허핑턴포스트코리아와의 인터뷰에 응하게 된 이유라고 밝혔다.

    이번 인터뷰는 철저하게 신동혁 씨의 진술에 근거해 기술되었음을 밝힌다. 그가 직접 밝힌 북한 탈출 과정과 인권운동, 그리고 증언 번복에 이르기까지의 경위를 일문일답으로 담았다. (이후에 신 씨와 SNS를 통한 질의응답을 추가로 넣었다.)

    [​IMG]

    - 지난 3일 열린 UN 인권이사회 얘기를 하겠다.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당신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탈북자들이 쓰레기"라는 발언도 했는데.
    = 북한 정권이 이렇게 나오는 것에 대한 내 반박은 간단하다. 내가 UN 조사단을 이끌고 내가 태어났던 수용소로 직접 안내해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다 풀린다. 말로만 자꾸 수용소 없다며 내 아버지를 강압해서 TV에 출연시키지 말고, 정말 북한이 당당하다면 나랑 조사단을 북한에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체면 안 차리고 얘기한다면 진짜 인간쓰레기는 북한 독재자가 아닌가. 어린 나를 협박해서 내 엄마와 형을 죽게 하였다. 독재자 고모부까지 눈 깜짝하지 않고 처형시키는 게 북한인데 누구를 보고 인간쓰레기라고 하나.

    - 정확한 탈북 시기가 언제인가.
    = 2005년도이다. 수용소를 총 3번 탈출해 2번 실패했다. 마지막에는 성공해서 한국까지 오게 됐다.

    - 증언 번복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14호 수용소에 대한 부분, 고문을 받은 나이가 증언과 틀리다는 것이다.

    = 최근에 불거진 논란들에 대해 나도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내가 했던 얘기를 나 스스로 부정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이 굳이 20살 때 고문받은 걸 왜 13살에 고문받았다고 했느냐는 사실에만 의미를 두고 따진다면 할 말이 없다. 그런데 내가 얘기를 바꾸었다기보다 처음엔 굳이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인간으로서 차마 밖으로 꺼내기 힘든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나의 삶이 이렇게 될 걸 알았다면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처음부터 모든 것을 밝혔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얘기들은 내가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던 것들이다. 14호 수용소에서 옷을 발가벗긴 채 거꾸로 매달리고, 갈고리에 찍혔던 흔적들은 모두 내 몸에 남아있다. 손톱이 뽑히고 내 손가락 마디가 날아가고, 발에 족쇄를 채운 자국들이 증명하고 있다. 엉덩이에서 등에 이르기까지 불이 붙어 타 올라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뜨거워서 소리 지르고 피가 튀어나왔던 상황들과 그때의 내 비명 등은 지금 이 자리에서도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런데 차라리 이런 것들은 참을만했다. 정작 감추고 싶었던 것은 다른 것들이다.

    - 무엇을 감추고 싶었나.

    = 어머니와 형이 내 신고로 처형됐다는 사실이다.

    - 왜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나.

    = 창피했다. 어느 누가 그런 얘기를 뻔뻔하게 할 수 있겠나. 북한에서는 사상교육을 철저하게 받기 때문에 가족끼리도 잘못된 일을 하면 신고를 하게 돼 있다. 열 네 살 때였다. 엄마하고 형이 탈출한다고 해서 신고를 했는데 간수가 다음 날 불러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올려놓았다. 자기들이 준비한 종이에 손도장을 찍으면 원하는 건 다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엄마랑 형이 사람을 죽였다는 내용이었는데 그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손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모든 사람이 엄마하고 형이 어떻게 살인을 했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일주일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바로 그 간수가 마을에 도둑질을 하러 갔다가 한 여자를 때려죽였고 우리 가족한테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그걸 다른 사람을 통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죄수 신분인 내가 간수의 잘못을 밝히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공개처형 당일 나와 아버지는 그 현장에 끌려가 맨 앞자리에 앉혀졌다. 어머니는 너무 굶어서 그런지 맞아서 그런지 몸이 팅팅 부어있었다. 후에 들어보니까 자기 밥을 아들에게 가져다 달라고 간수들에게 부탁하고 굶었다더라. 어머니가 마지막 순간에 끌려나가며 나를 쳐다보았지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머니는 교수형으로, 형은 총살로 세상을 떠났다.

    어떻게 엄마를 신고하느냐고 묻는데 환경이 그렇게 돼 있다. 수용소에서는 그게 옳은 행동이라고 느낀다. 그곳에서는 내 아버지도 엄마도 다 죄수들일 뿐이다. 말로만 엄마라고 부를 뿐 함께 부대끼며 보내는 시간이 없었다. 가족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모르고 자랐다. 수용소에서 태어난 나를 환영해 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거기서는 모두가 똑같은 죄수들이다. 감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무리 북한이라지만 눈앞에서 가족을 공개처형 할 수 있나.

    = 그게 북한이다. 공개처형을 할 때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보도록 한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효과가 더 크기 때문이다. 최근 사람들이 IS의 공개처형 장면을 보고 끔찍하다 하는데 눈에 보이니까 끔찍하다 느끼는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더 끔찍하다.

    - 왜 증언을 번복할 수밖에 없었나.

    = 북한이 사실과 다른 내용이 조작된 동영상을 공개했다. 북에서 고초를 겪는 아버지를 앞세워 거짓말을 하게 만든 사실에 분개했다. 어머니와 형이 살인죄로 처형됐으며 나는 편안하게 공부했다고 하더라. 심지어 나더러 성폭행범이라고 했다. 지난해 9월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있는 그대로의 수용소 이야기만 했는데 동영상이 공개되고 나서 ‘북한은 정말 나쁜 놈들이구나’하고 나도 모르게 쌍욕이 터져 나왔다. 더는 아무것도 숨겨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모든 진실을 처음부터 밝히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었다.

    - 북의 수용소에서 살면서 탈출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떻게했는가. 바깥세상에 대해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 처음에 수용소 탈출할 때 바깥 사회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다. 처음에 탈출했다가 잡혀 들어갔지만 탈출했을 때 본 것 느낀 것들 때문에 더이상 수용소에서 사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됐다. 이런 게 아마 내 생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내 몸이 느끼는 자유라는 것일 테다. 학교 교육은 글 쓰고 셈세고 그외에 별로 배우는 게 없다. 14호에서는 그런 것도 잘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 당신은 북한에서 두 번이나 탈출했다. 또 어머니와 형이 처형당할 정도로 감시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북한은 왜 당신을 살려두었을까.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강한 의심을 하기도 한다.

    =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가 잡혀들어와서 총살당하는 사람들도 많이 목격했다. 내 경우에는 운인지 아니면 내가 너무 멍청해서 자꾸 탈출했었던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북한이 지금 크게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처음 탈출했었을 때 죽였어야 했었다고 말이다.

    - 신동혁이 14호 수용소에서 탈출한 게 아니라 18호 수용소에서 탈출했다고 해서 논란이다. 두 수용소가 크게 다르다고 알려졌기 때문인데.

    = 그렇지 않다. 오해가 많은데 조금 복잡하지만 설명해 보겠다. 나는 이미 진술한 대로 14호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에는 14호 수용소만 있고 18호 수용소는 없었다. 그러던 중 1985년경에 14호 수용소에 살고 있던 사람 중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 강 건너편 마을로 이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무슨 기준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 가족은 남아 있는 사람들에 포함되었다. 수용소 인원 대부분이 밤사이 다리를 건너 이주했다. 그날부터는 강 건너편 수용소가 14호, 원래 14호였던 곳은 18호 수용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두 번째 탈출 시도 후 다시 잡혀 들어간 곳이 14호 수용소이기 때문에 증언의 내용이 틀린 것은 아니다. 더구나 14호, 18호 모두 정치범 수용소가 맞고 결코 14호 생활이 18호보다 더 혹독하지 않다.

    [​IMG]
    신동혁씨가 자신이 살았던 14, 18호 수용소를 '구글 어스'(google earth)를 이용해 설명하고 있다. 대동강을 기점으로 북으로는 14호, 남으로 18호 수용소가 위치해 있으며 신씨는 자신이 살았던 수용소의 규모, 망루의 위치, 철조망, 죄수들의 생활 반경 등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IMG]



    - 수용소에 사람이 얼마나 거주하나.

    = 18호 수용소에만 죄수와 간수를 포함해 2만5천 명이 있다.

    - 14호와 18호 생활의 차이는?

    = 사람들은 14호 수용소가 살기가 어렵고, 18호는 편한 줄 아는데 나에게는 똑같았다. 오히려 18호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더 고통스러웠다. 두 수용소는 모두 철조망이 처져 있으며 망루에서 간수들이 노역하는 것을 감시한다. 각자 생산한 농산물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14호 수용소에서는 농사가 잘됐고, 18호는 잘 안 되어 18호 수용소 사람들이 대동강을 헤엄쳐 건너 14호에 가기도 했다. 그런데 수영할 힘이 없으니 물에 빠져 죽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이런 얘기하고 싶지 않지만…. (이 부분에서 신동혁 씨는 유일하게 잠시 망설였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기 때문인지 어금니를 몇 번 악물었다) 내가 싼 똥까지 집어 먹었다. 먹은 게 풀밖에 없어서 냄새도 나지 않는 그런 똥이다. 18호 수용소에서는 사람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18호 사람들은 오히려 14호 수용소의 죄수들을 부러워했다.


    신동혁 씨 주장에 따르면 그는 3번의 시도 끝에 북한의 수용소를 탈출했다. 첫 번째는 1999년, 아버지가 써준 편지를 들고 난생처음 고모네 집을 찾아 달아난 것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와 잠복하고 있던 경찰들에게 붙잡혔다. 철조망을 넘고 산을 건너 2주 동안 도망쳤지만, 다시 수용소에 갇힐 때까지는 딱 3일이 걸렸다. 숱한 폭행과 가혹 행위가 기다리고 있는 18호 수용소로 그는, 다시 소환됐다고 한다.


    돌아온 그는 수용소 안 농장, 탄광 등에서 닥치는 대로 노역을 했다. 수용소 내의 음식은 옥수수, 배추, 소금으로 만든 죽과 때때로 잡히는 들쥐와 곤충 등이 전부였다. 아파서 노역하지 못하면 그마저도 절반으로 줄인다고 한다. 1년이 지날 무렵, 신동혁은 쇠약해졌고 픽픽 쓰러졌다. 그 무렵 식모 보조 일을 맡게 됐다.


    수용소에서는 늘 아침밥(그곳에서의 밥은 옥수수를 말한다)을 그 전날 밤에 해서 바닥에 펼쳐둔다. 밤사이 차게 식으면서 삶은 옥수수가 불어나기 때문에 양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식모가 그를 혼자 두고 자리를 비웠다. 밥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다. 그저 정신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퍼먹었다. 신동혁은 다 먹고 나니 급식을 못 먹는 사람이 나오면 금방 들통 나 매를 맞을 생각에 앞이 아득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도망쳤다.


    그는 당시를 2000년 11월(추정)로 기억한다. 그는 양말에 밥을 담았다. 돼지 먹이를 준다는 핑계로 먹이통을 들고 나갔다. 원래 죄수들은 간수에게 5분에 한 번씩 목청껏 외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죄수 신인근, 돼지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라고. 그러다 망루에 있던 간수가 잠깐 돌아선 후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먹이통을 냅다 버리고 도망쳤다. 첫 탈출 때와 같은 통로를 통해서였다.​



    [​IMG]


    - 2번째 탈출이다. 중국으로는 어떻게 도주했나.

    = 추운 겨울이었다. 헤맸지만 저번처럼 잡히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을로 섞여 들어가서 북쪽을 가니 중국으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달 만에 넘어갔다. 중국에 가서 일했는데 4월에 중국 공안에 또 잡혔다. 일해주던 집의 남동생이 나를 신고한 것이었다. 새벽에 농사짓는 철이니까 밭에 일하러 나갔다가 들어오니 공안들이 다짜고짜 나를 묶어 족쇄를 채우고 차를 태웠다. 경찰서에서 수용소에서 왔다고 진술하니 다시 북한으로 보낸다 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 와중에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중국 형사가 있었는데 나한테 ‘한 번 더 도망쳐 와라. 그때는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북한에서 가서 먹으라고 빵과 바나나까지 가득 사서 주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신 씨에 따르면 그는 탈북자들을 잡아두는 도문변방구류소에 잠시 머물렀다. 북한의 최고 정보수사조직인 비밀경찰 국가안전보위부가 그를 찾아 왔다. “이 새끼 도주자 신동혁이! (뺨을 세차게 때린 뒤) 중국 가서 잘 살았네?” 북한 함경북도 원성군 창평리 보위부 수용소로 끌려온 그에게 또다시 구타가 시작됐다. 좁디좁은 방에 남녀죄수들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 후 18호 수용소로 오게 됐다. 2번의 탈출 실패였다.

    돌아온 그는 2002년 12월경, 아버지와 다시 만나게 된다. 옥수수 끓인 죽을 쑤어온 아버지는 면회실에 들어서는 신동혁 씨의 뺨을 때렸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멍청한 놈아 왜 중국에 가서 잡히네. 도망치면....영원히 도망쳐서 잡히질 말아야지..” 무거운 흐느낌의 시간이 지나자 아버지는 말했다. “너 내일 14호 수용소로 넘겨진단다.” 그때가 아버지를 본 마지막이었다는 게 신동혁 씨의 말이다.

    그는 14호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불 고문과 손톱 뽑기, 혼절하게 하는 혹독한 고문이 연일 반복됐다. 그러던 날, 2004년 12월 중국으로 도망치다 잡혀 들어온 박씨를 만나게 된다. 박씨는 신동혁에게, 어쩌면 예견된 그 얘기를 했다고 한다. “당신 두 달 뒤에 처형된다 들었다. 그런데 나도 죽일 거 같다. 같이 도망치자.”

    2005년 1월 2일, 신동혁과 박씨는 수용소 철책 부근의 작업에 함께 투입되었다. 간수들의 순찰간격이 길다는 것을 눈치챈 둘은 간수들이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탈출했다. 그러나 박씨는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책에 몸이 닿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신동혁은 빠져나왔다. 수용소를 탈출한 신동혁은 인근 농가로 들어가 낡은 군복으로 갈아입는다. 군복은 신동혁의 신분을 군인으로 위장할 수 있게 해주었고, 그는 필요한 식량을 훔치면서 북쪽의 국경지대로 다가갔다. 신동혁은 담배와 훔친 음식으로 비대원을 매수하고,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중국을 떠돌며 노동일을 하던 신동혁은 상하이의 음식점에서 한 기자와 우연히 만난다. 신동혁의 탈북 경험이 가진 가치를 알아본 기자는 주중 대한민국 대사관에 보호를 요청하고, 신동혁은 곧 대한민국으로 보내지게 된다.​


    - 중국으로의 탈출과정이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

    = 중국에서 가면서는 제가 조심을 했다. 사람들을 피하고 위험한 곳으로는 가지 않았다. 내가 탈출한 것을 감지하고 아마 나를 잡으려고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경험상 탈출자가 조금만 조심하면 수용소에서 다시 잡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탈출자를 잡으러 나오는 사람들이 차를 가지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도 기차 타야 하고 트럭 같은 것을 얻어타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탈출자가 갈만한 곳을 예상해서 찾아가고 일일이 사람 얼굴들을 확인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 영화 ‘더 인터뷰’의 감독이 신동혁씨 자서전을 보고 영감을 얻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생각하나?

    = 그냥 코미디 영화이다. 내 이야기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북한이 아무 얘기도 안 했으면 삼류 영화로 묻혔을 텐데 보복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영화가 오히려 북한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이다. UN에서도 북한 외교관들의 모습을 보면 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 세계 외교관들 앞에서 ‘더 인터뷰’ 영화에 대해 보복한다고 하고, ‘최고 존엄’만을 중요시하는 걸 보면 말이다. 중국 외교관조차도 이해를 못 한다. 인권결의안 통과도 그런 것들의 영향이 컸다.


    [​IMG]



    - 북한 인권문제에 사람들의 관심이 저조하다.

    = 너무나 슬픈 사실이다. 한국사람들도 이제 내성이 생겨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번 일이 터지고 나서 뉴스 댓글을 보면 나에게 확 죽어버리라는 말도 있더라. 북한에 가서 하지 시끄럽게 UN에 나간다고 비난도 한다. 그런데 실상 한국에는 이런 독재자를 찬양하는 세력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끔찍하다. 우리 자신도 우리가 받은 고통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국제사회가 도와줘야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무관심하고, 독재정권의 피해자들이 오히려 비난하는 분위기...불공평하지 않은가? 너무나 막막하고 끔찍하다.

    - 종편에 출연하는 탈북자들이 스토리를 과장한다는 지적들이 제기된다

    = 돈을 주면서 (자꾸 부추기니까) 과장하게 된다. 탈북자들이 종편에 오히려 이용당하고 있다. 종편을 탈북자들이 만든 것도 아니지 않나? 인기몰이를 위해 탈북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종편이다. 탈북자들을 비난해서는 안된다.

    - 북한 인권운동을 한 것에 대해 후회하나.

    = 이 생활 자체를 원하지는 않았다. 비행기 타고 다니고 UN에 가서 내가 당했던 고통을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해야되는 생활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내가 지금도 후회되는 게 ‘내가 왜 인권운동에 발을 들였나. 산속에 들어가서 살면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든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반복해 증언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를 것이다. 뭔가를 말하고 나면 그날 꿈에 나온다. 잊고 살아야 할 과거의 악몽을 계속 되풀이 하는 셈이 되었다.


    [​IMG]



    - 앞으로 북한인권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

    =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북한을 괴롭히는 일이다. 그리고 북한을 뒤집는 일이다. 북한 독재정권을 뒤집어 놓는 것이 내 임무다. 내가 이전까지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북한을 뒤집고 내 가족의 명예를 되찾고 수용소를 없애는 것이 내 목표다. 북한에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내가 살았던 곳은 잘 아니까 내가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증거가 되는 것이다. 내가 너무 잘 아니까. 조사단을 받아들이고 내 아버지를 만나서 왜 수용소로 잡혀 들어갔는지 밝혀야만 한다. 그것을 위해 UN 조사단을 이끌고 수용소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못할 일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신동혁 씨는 인터뷰 가운데 시종일관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고문 과정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도 표정이 일그러지거나 하지 않았다. 취재진은 고문 과정에서 몸에 입은 상처들을 사진에 담겠다고 했으나 거부했다. “샤워할 때 내 모습이 가장 보기 싫은 모습”이라며 자신의 몸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기 싫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한 뒤 그는 생각을 바꿨다. 자신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 사진을 올린 것이다. 그는 “제가 이렇게까지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재자가 어떻게 사람들한테 가장 끔찍한 고통을 주면서 쾌락을 느끼는지 알리는 방법이 이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내 몸에 있는 고문 흉터들을 전부 다 올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의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분명한 것은 그의 몸에 난 상처와 흔적들은 진짜라는 것이다.​



    [​IMG]
    신동혁씨가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고문의 흔적이라고 공개한 사진. 신씨의 주장에 따르면 발목에 사슬이 채워진 채 천장에 거꾸로 매달린 뒤 불로 고문을 당한 흔적이다.

    [​IMG]
    신동혁씨는 손톱 전체가 뽑히는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 상처들은 손톱을 뽑는 기계에 짓눌린 손의 흔적, 뽑힌 손톱으로 인해 손톱이 기형으로 가는 흔적들, 고문 도중 손가락이 날아간 흔적이라고 신동혁씨가 증언하는 것들이다.
     

페이지 공유하기